▲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인류 역사 수많은 제도 가운데 현대인의 입장에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게 있다면 신분제도일 것이다. 신분제도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차별제도인데, 차별의 대상은 언제나 약자였다.
인류는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멈춘 적이 없다. 현대 프랑스의 인류사회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인류의 친족구조가 자기 집안의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증여하고 타인의 여자를 답례 받는 방식으로 구축되었다고 주장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애인에 대한 합법적이고도 가혹한 차별을 정당화했다.
나는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 이상으로 나쁜 차별제도는 노예제도라고 본다. 조선은 신분사회였고 노예제도를 유지한 나라였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의 우리가 조선시대의 공익성과 인권수준을 평가하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신분제도를 두둔하거나 노예제도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상인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예컨대 얼마 전 한국 교육부의 어느 관리가 ‘대중은 개, 돼지와 같다’고 말했다가 파면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니체도 이와 거의 비슷한 같은 말을 했다.
인류 역사에서 노예제도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공식적으로 노예제도가 소멸한 지는 불과 150년도 되지 않는다. 고대 로마에서는 시민 1명 당 평균 20명의 노예를 거느렸다. 이것은 찬란했던 로마 문명이 누구의 희생에 의해서 세워졌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조선 노비(奴婢, 남종과 여종)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30% 정도였다. 그들 역시 교육과 관직 등용에 제한이 있었고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서양의 노예(slave)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어폐가 있기는 해도 조선의 노비는 서양의 노예에 비해 다소간 ‘인간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려나?
조선의 노비는 양인과의 결혼이 허용되었다. 여비(女婢)가 양반의 처첩이 된 사례는 무수하며 남자종이 양인 여자와 혼인한 경우도 허다했다. 그리고 이런 경우 후손은 대개 양인의 신분을 인정받았다.
조선시대 주인과 노비 간의 관계는 군신간의 관계와 비슷하여 상호에게 윤리적인 책임과 의무가 주어졌다. 주인은 노비를 죽일 수 없었고 노비에 대한 범죄라고 해서 정상참작 되는 일이 없었다. 노비는 자신의 성씨를 가졌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들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생계가 어려운 양인이 자진해서 노비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또한 60세 이상과 15세 이하 노비와 장애인 노비는 역을 면제 받았다. 노비는 비록 잡직이라고 하더라도 관직으로 등용될 수 있었으며 공을 세우면 양인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관노비에게는 출산휴가가 주어졌는데 특히 세종 때에는 출산 전 한 달, 출산 후 100일로 휴가 기간을 늘려주는 조치를 취했다. 관노비 중에서 뛰어난 기술자와 예능인은 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은 서양과 달리 공개적인 노비 시장도 없었고 따라서 노비 상인도 있을 수 없었다. 노비 거래는 개인 대 개인 형식으로만 할 수 있었다. 노비는 실제로 수공업자나 상인 등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이들을 한 데 묶어서 ‘공상천예’로 호칭했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양인과 하는 일이 다르고 신분 계급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한 인간으로서 인권은 양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여종에 대한 성폭행은 오히려 가중 처벌된 점을 보면 조선이 약자에 대한 배려를 높은 수준으로 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조선 사회를 서양의 노예제 사회(slavery society)와 동질로 보는 견해는 교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