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는 주인공 허생이 훈련대장 이완을 만나 북벌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북벌이란 효종(재위 1649~1659)이 내세운 청나라 정벌을 의미한다.
소설 속의 허생은 조정의 사대부들이 실제로는 의지도 없으면서 말로만 북벌을 내세우는 허위의식에 빠져 있다고 비난한다. 허생은 가공인물이기는 하지만 작가 박지원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박지원이 청의 문물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북학파의 일원이었다는 점에서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허생전>은 박지원 당대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박지원의 생몰연대는 1737년 영조 13년부터 1805년 순조 5년까지다. 그러니까 <허생전>은 박지원이 자기가 살던 시기에서 거의 100년 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쓴 소설이 되는 셈이다.
게다가 박지원은 <허생전>을 쓸 때까지 현실정치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는 과거에 낙방한 후 벼슬에 뜻을 접고 학문과 저작을 주로 하며 살았다. 그가 안의현감과 양양부사를 지낸 것은 먼 훗날 음사(蔭仕)로 관직에 진출한 이후의 일이다.
<허생전>은 박지원의 문집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가 알듯이 열하일기는 일종의 사행록(使行錄)으로서 ‘북경–열하–북경’의 노정이 담겨 있다. 박지원이 사신단의 일원이 된 것은 8촌형 박명원이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사신단의 비공식 수행원이었다.
흔히 박지원을 ‘실학파’라고 하는데, 사실 실학이라는 학문은 없었다. 실학이 없으니 실학파도 있을 턱이 없다. 물론 당시 북경에 여행하고 와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자고 주장한 일군의 유학자들을 따로 북학파라고 부를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실학이나 북학은 아니다. 나는 박지원이 <허생전>에서 문제 삼은 ‘북벌의 허위의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물론 효종이 내세운 북벌은 실현되지 않았다. 효종은 청나라의 요청에 의해 나선정벌(조청연합군과 러시아군의 전투)을 수행했을 뿐이다.
북벌을 내세운 효종과 사대부들이 북벌에 진짜 의욕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그들은 ‘북벌’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성공한 것만은 틀림없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인데 형 소현세자가 급서하여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세자도 아니고 세손도 아니어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지지했던 김자점이 문제가 있는 인물임을 알게 되자 분연히 그를 몰아냈다.(김자점은 나중에 조선이 북벌을 모의한다고 청에 밀고했다가 처형당함)
효종은 오히려 자기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산당(山黨, 산림에서 지내던 학자들이라는 뜻)의 두 지도자 송시열과 송준길을 각각 대사헌과 이조판서로 불러들였다.
이후 효종과 산당은 ‘북벌의식’을 공유하면서 실제로는 힘에 부치는 북벌보다는 국내 국방력 강화에 힘을 쏟았다. 효종은 부서진 성을 축조하고 군제를 개편했으며 이완을 훈련대장으로 삼아 주로 예산이 적게 드는 정예병을 양성했다. 조선군이 나선정벌을 깔끔하게 수행한 것도 이런 철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도 조선군의 우수성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청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하지 않고 우호국으로 격상하여 대우했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통일공정을 마무리한 청 역시 안정과 평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효종은 대외정책에서는 산당과 협조했지만 대내적으로는 한당(漢黨, 영수 김육이 한강 부근에 살아서 붙은 이름)의 정책을 채택했다. 우의정 김육은 대동법에 대한 확신주의자였다. 효종은 김육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경기도에 이어 충청도로 대동법을 확대 실시했다.
반청의식을 달래기 위해 북벌을 내세운 산당과 민생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주장한 한당은 서로 정책이 달라도 극렬한 대립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기 당파의 노선을 무조건 지지하는 게 아니라 개별적으로 자기 소신을 피력했다. 그래서 한당 중에도 북벌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산당 중에도 대동법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었다.
유학에서 나라의 위기를 타개하는 원리는 ‘내수외양(內修外養)’이다. 내실을 다지면서 외부의 적대세력을 물리친다는 논리이다. 효종과 두 정당 산당과 한당은 이것을 조화롭게 실현했다.
왜란과 호란으로 인한 미증유의 위기는 이렇게 하여 극복해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100년 전의 북벌을 무조건 허위의식으로 몰아붙인 박지원은 생각이 짧았거나 무책임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