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16세기 후반기부터 17세기 중반기까지는 조선이 건국 200년 만에 맞은 일대 난세로서 선조(1567~1608), 광해군(1608~1623), 인조(1623~1649)가 차례로 재위한 시기였다. 우리가 알듯이 이 기간에 조선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이라는 ‘대란’을 겪었다.
임진왜란의 후속으로 정유재란(1597)이 있었고 병자호란의 전초로서 정묘호란(1627)이 있었다. 불행히도 위 82년 동안의 난세에 세 군주는 하나같이 뚜렷한 지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임진왜란은 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병자호란은 정묘호란을 합하더라도 5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임진왜란에 비해 병자호란의 피해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임진왜란이 승전(최소한 불패)으로 마감한 전쟁이었던 데 반해, 병자호란은 패전으로 봉합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청(淸)이 병자호란을 일으킨 이유는 명분과 실리 양면을 다 취하기 위해서였다. 언제부터라고 시점을 명시할 수는 없어도, 청은 명(明)을 제압하여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 청은 명의 제1 번국(藩國)이자 우방국이었던 조선의 동의가 필요했다. 또한 청은 실제적인 물자와 군사 면에서도 조선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청은 병자호란을 통해 이 두 가지를 다 얻어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청에 바친 희생은 다방면으로 참혹했다. 요컨대 병자호란은 전쟁의 직접 피해에 비해 후속 피해가 더 컸던 전쟁이다.
이와 달리 임진왜란은 전쟁이 끝남으로써 피해도 없어진 전쟁이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곧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요청해 왔다. 이처럼 국가간 전쟁에서 승전과 패전의 차이는 천양지차로 나는 법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제1피해국은 조선인 것 같지만 조선보다 더 큰 피해를 본 것은 명나라라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먼저 청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킨 덕으로 정치적 안정과 군사적 강화를 기할 수 있었다. 결과 병자호란 7년 후 청은 명을 멸망시켰다.
이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주동국 일본 대 방어국 ‘조선 + 명’이 벌인 전쟁이었다. 따라서 전쟁의 열외에 있던 청(후금)은 마음 놓고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켜 가면서 군사력을 확장, 강화했다. 아울러 제1,2 경쟁국이었던 명과 조선의 군사력은 반대로 급속히 소모되었다.
대제국이었던 명이 망한 원인은 내부적인 데에도 있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한 것도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사실 당시 명은 조선에 지원군을 보낼 형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명 황제 만력제(13대 신종, 재위 1573~1620)는 대규모의 조선 파병을 단행했다.
(만력제는 1592년 영하에서 일어난 발배의 난과 1594년 사천과 귀주에서 일어난 양응룡의 난, 1592년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 등에 대규모로 군사를 사용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명의 멸망을 자초한 ‘만력3정(征)’이라고 한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나라를 다시 만들어 준 은혜’라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나라가 망할 때 큰 도움을 준 은혜’라는 뜻이다. 이 말은 임진왜란 후 조선의 선조와 사대부들이 만들어 쓴 말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 임진왜란을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들을 보면 당시 참전한 명군의 행패가 많이 나온다. 이것은 사실이다. 당시 명군은 보급이 여의치 않자 조선에서 식량을 약탈에 가까운 수준으로 현지 조달하기도 했다.
또한 명의 지휘관들은 상국의 장수라는 오만함으로 조선의 관료들은 물론 심지어 임금까지 경시하기도 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고 비유하여 명군의 횡포가 오히려 더 크다고 지적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재조지은’은 분명히 조선에 모욕적인 말이다. 아니 조선인이 이 말을 스스로 쓴다면 자학적인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모든 역사에는 허(虛)와 실(實)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조선역사처럼 허가 부풀려지고 실이 감추어진 역사도 드물다고 본다.
일단 재조지은은 명나라 전체를 대상으로 쓴 말이 아니라 지원군을 보낸 특정인 만력제에게 쓴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을 일방적으로 사대주의의 소산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명군이 행패만 부렸을 뿐 조선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주장도 타당치 않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전한 것은 의병들의 분전, 이순신의 활약과 함께 명군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 조선군과 명군의 최대 병력 수는 조선군 17만, 명군 5만이었다. 그런데 전쟁 말기 조선군 대 명군의 비율은 3만 대 11만으로 각각 감증했다. 조선군은 농사 등의 생업을 위해 전장에서 대거 빠지고 명군이 빈자리를 메운 것이다. 이것은 명나라 입장에서는 조선이 자기들 전쟁에 명군을 총알받이로 이용해 먹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명나라는 군사적인 면 외에도 조선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임진년 이후 조선에는 전쟁과 함께 기근이 닥쳤다. 이때 만력제는 자국 재정을 털어 산동지방의 쌀 100만 석을 매입해서 조선에 전량을 수송비용까지 부담하면서 무상으로 제공했다. 100만 석이면 9만 톤인데, 이것은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엄청난 양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재조지은은 선조와 조선 사대부들이 썼던 말이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이 말을 계속 끌고 간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청과의 외교에서 방어논리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훗날 통일을 이룬 청은 명과의 의리를 지킨 조선인의 태도를 높이 인정했다.
‘재조지은’은 일제 강점기부터 힘을 얻은 말이다. 놀라운 것은 이 말이 조선을 비하하기 위해 쓰인다는 점이다. 또한 오늘의 한국인은 재조지은을 조선시대 사람들과는 반대의 목적으로 더 많이 즐겨 쓰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인의 ‘재조지은’과 한국인의 ‘재조지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자학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