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소현세자 : “천리 밖의 객이 되어 황상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성실한 관대를 받음에 감배하옴을 이길 길 없사옵니다.”
홍타이지 : “괜찮다.”
소현세자 : “언어가 불통하여 황상이 말씀하오나 제가 능히 살피지 못하고 또 제가 생각이 있어도 능히 스스로 진술하지 못하니 답답하나이다.”
홍타이지 : “그건 그렇다.”
홍타이지는 소현세자의 손을 잡으며 덧붙인다. “그대의 말에 뜻이 이미 숨어 있으니 내가 이미 그것을 헤아렸노라.” 홍타이지는 주안상을 차리게 하여 술 3배를 나누고 소현세자를 보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장남이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태조 누르하치의 8남으로서 청을 건국하고 칭제건원한 정복 황제였다. 우리가 알듯이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후 볼모로 청에 잡혀온 처지였다. 홍타이지가 소현세자를 침소로 불러 친히 접견한 장소는 심양고궁, 이때 두 사람의 나이는 각각 25세, 45세였다.
상당히 인간적이고 품격 있는 만남처럼 보인다. 잡혀온 피정복국의 세자를 애틋해하는 홍타이지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후 홍타이지와 소현세자는 함께 사냥도 하고 물고기도 잡으며 어울리기도 했다.
청이 명을 정복한 것은 홍타이지가 죽고 난 다음 해인 1644년이다. 3대 황제 세조와 황제의 숙부인 도르곤은 북경 자금성을 접수하러 가는 길에 소현세자를 마차에 배석시켰다. 또한 당대 최고 실력자 도르곤은 홍타이지 이상으로 소현세자를 각별히 배려했다.
우리는 병자호란 하면 치욕의 역사로 기억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삼전도의 굴욕, 강요된 ‘군신지의(君臣之義)’, 포로로 끌려간 숱한 백성들, 삼학사의 비극 그리고 볼모로 잡혀간 왕자들이 떠오른다. 누가 뭐래도 병자호란은 조선이 기록한 일대 치욕의 역사였다.
1592년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후금의 누르하치는 조선에 지원군을 파견하겠다고 제의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일이 있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조선에 쳐들어온 후금은 황해도까지 들어왔다가 서울로의 진격을 멈추고 조선에 화의를 제의하여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고 되돌아갔다.
이후 후금은 명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당연히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후금은 조선에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기들과 맺은 형제지맹을 준수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1631년부터 1633년까지 홍타이지는 조선에 수군과 함선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요청을 들어주면 과거의 원한을 모두 지우겠다고 했지만 조선 조정은 오히려 격분하는 반응을 보이며 기왕의 ‘형제맹약’까지 재고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타이지가 몽골을 완전히 제압하여 원의 국새를 상납 받은 것은 1635년이다. 주변에서 홍타이지에게 황제의 보위에 오를 것을 건의했다. 여기에는 그의 맏형까지 나섰을 정도로 홍타이지의 위치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조금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자기가 황제로 오르는 데 형제국인 조선과 상의가 있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윽고 홍타이지는 조선에 용골대와 몽골의 왕자들을 사신으로 보냈다. 몽골도 자기를 황제로 인정한다는 것을 조선 조정에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반응은 예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강고했다. 조선의 척화파 대신들은 몽골 왕자들은 물론 사신 용골대에게까지 위협하는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용골대는 조선의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서둘러 심양으로 도주했다.
끝내 조선의 동의를 받지 못한 채 홍타이지는 1636년 3월 칭제건원 의식을 거행했다. 당시 심양의 즉위식장에는 조선의 춘신사 나덕헌과 이확이 와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홍타이지에 대한 배례를 끝까지 거부했다. 그들은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홍타이지는 조선에 두 사람을 돌려보내며 조선왕에게 보내는 국서를 주었지만 그들은 국서마저도 팽개치고 조선으로 되돌아왔다.
병자호란은 이렇게 하여 발발한 것이다. 홍타이지는 조선 출정에 앞서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열고 정묘호란 이후 ‘조선이 범한 과오들’을 나열했다. 우리가 알듯이 병자호란으로 인한 조선의 굴욕과 피해는 막심했다. 한편 명을 완전히 정복하고 천하통일과업을 마친 청은 볼모로 잡아간 조선의 왕자들을 돌려보냈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편의 잘잘못을 가리자는 게 아니다. 청은 왜 이토록 조선을 유별나게 의식했는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대국과 소국의 관계에는 ‘사대’와 함께 ‘사소’도 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사대도 어렵지만 사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체로 아랫사람 노릇하기보다 윗사람 노릇하기가 더 어렵다. 중국은 조선에 비교적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소’해 온 전통이 있다. 중국이 주변 20개 왕조국가 중에서 가장 우대한 나라는 조선이었다.
청의 선임국 명의 태조 주원장은 유훈에서 주변에 정복하지 말아야 할 16개 왕조를 거명하면서 첫째로 조선, 둘째로 베트남을 들었다. 그는 따로 ‘나의 후계자들이 조선을 정벌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명이건 청이건 그들이 조선을 상대적으로 우대한 것은 역사적 팩트인데, 그렇다면 이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조선 문화의 힘과 수준’ 때문이었다고 본다.
나쁜 역사라고 해서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좋은 역사라고 해서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역사에든지 명암이 동시에 존재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에 우애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청나라가 전성기를 누렸을 때의 황제 강희제와 건륭제는 병자호란 때 조선인이 명에 보인 ‘의리’를 높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