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광해군, 내치 없는 외교가 가능할까

[2018년 1월 12일 / 제154호]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91 영암우리신문l승인2018.01.12l수정2018.01.12 13:25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내치에는 병신, 외교에는 귀신’이란 말이 있었다. 옛날 이승만을 두고 한 말이다. 광해군도 이와 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광해군은 외교는 잘했을지 몰라도 나라 내부를 잘 관리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내치를 못하면서 외교를 잘할 수 있는 일일까? 이것은 ‘수신제가’ 없이 ‘치국평천하’가 가능한 일인지를 묻는 질문과 비슷하다.
“17세기 리조봉건이 대외관계에서 취한 중립적 태도는 당시에 궁정 내부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의 참극 속에서 정권 탈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서인 당파들에게 공격의 구실을 주었다.”
이것은 조선(이북)에서 1979년에 발간된 『조선전사 9』 에 수록된 내용이다. 이 책은 ‘당시의 서인 양반들이 광해군을 혈육들을 살해한 패덕한으로 무턱대고 몰아냈다’고 말함으로써 인조반정 세력보다는 광해군 편을 들고 있다. 1979년이면 벌써 38년 전 일이다. 지금도 이북에서 광해군을 38년 전처럼 두둔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조명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했고 강홍립은 항복했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했다.”
이것은 2007년 한국에서 발간된 교학사 국사 교과서에 담긴 내용이다. 이 교과서는 광해군의 외교를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결국 남과 북의 평가를 종합하면 ‘광해군은 외교를 잘했지만 당파싸움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군주’라는 것인데, 이런 입장은 요즘 한국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광해군의 중립외교까지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중립외교라는 게 무엇인지는 좀 더 정확히 따질 필요가 있다. 광해군을 칭찬하는 사람들은 그가 파병을 하며 강홍립에게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지시한 것을 잘한 일로 여긴다. 그래서 강홍립이 신생 강국 후금에 끝까지 저항하지 않고 항복한 것도 적절히 처신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강홍립이 항복한 것은 이미 9,000명의 전사자가 난 이후의 일이다. 총원 1만 3,000명 군대에서 9,000명이 죽었다는 것은 항복이 아니라 ‘궤멸’ 수준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무엇을 위한 ‘적절한 처신’이란 말인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복원한 것을 무리를 범한 일이라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광해군의 궁궐 공사에 비하면 대원군의 경복궁 복원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이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창덕궁이 완공된 것은 광해군 원년이었다. 당시 나라 형편은 창덕궁 하나면 족할 정도였다. 그런데 광해군은 다시 창경궁 공사를 벌여 8년 만에 완공한다. 아울러 경운궁도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했다.
광해군은 애초에 교하로 천도하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수도 이전은 온 나라를 술렁이게 만든다. 수도를 이전하려다가 거센 반대에 직면한 광해군은 대신 궁궐 공사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다시 재위 9년부터 경덕궁과 인경궁 공사에 들어갔다.
결국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덕수궁),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등의 공사가 광해군 집권기 내내 벌어졌다. <광해군일기>에 기술된 사관의 평가를 읽어 보자.
“이때 서시(강홍립 군대)가 패전해 수만 명의 백성이 쓰러져 죽어 갔으니,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운송해 강변으로 들여보내는 것이 급무였는데도, 밤낮으로 일삼는 것이라고는 오직 궁궐을 짓는 한 가지 일밖에 없었다.... 만일 궁궐을 짓고 보수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어찌 어지럽거나 망하는 재앙이 있었겠는가.”
임진왜란 전 경복궁의 규모는 700칸이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지은 경희궁은 1,500칸, 인경궁은 무려 5,500칸이나 된다. 오항령 교수는 『조선의 힘』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대면서 ‘당시의 궁궐 공사비는 국가 예산의 15~20%를 차지했다’고 말한다. 참고로 이명박이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다가 철회한 대운하 공사비는 국가예산의 7~8% 규모였다.
당연히 재정이 고갈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한시의 틈도 없이 궁궐공사를 밀어붙였다. 이 엄청난 재정이 어디로부터 조달되었는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광해군은 근거도 없는 ‘결포세’를 거두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짰다. 가렴주구로 인해 백성의 삶은 도탄지경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이때가 임진 병자 양란의 중간 시점이었다. 전시였다는 것이다. 오항령 교수는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구를 거절한 것도 실은 궁궐공사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내놓고 있다. 광해군은 궁궐을 신축하기 위해 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기도 했다.
이런데다가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세 살 위 형 임해군을 죽였다. 그리고 유년의 아우 영창대군마저 쳐 죽였다. 그리고 서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물론 이러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연루자들을 죽였다. 이런 왕을 어떻게 방치하겠는가? 나는 인조반정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광해군 사후 3년 만인 1627년 조선은 정묘호란을 겼었고 1636년에는 병자호란을 맞았다. 결과론이기는 하지만 그가 외교를 잘했다면 이런 일이 바로 벌어질 수 있었을까? 그의 중립외교는 국익보다 사익을 위한 것이었던 데다가 기회주의적이기까지 해서 조선은 청과 명 양국으로부터 끝없는 의심과 불신을 자초했다.
광해군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광해군 이전의 선조와 이후의 인조를 나쁘게 평가한다. 이 대목에서 하나 유의할 것이 있다. 광해군은 조선의 이단자였다. 선조와 인조는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주류였다. 조선의 주류를 폄하하고 이단자를 높이는 역사적 관점은 대부분 식민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암우리신문  news@wooriy.com
<저작권자 © 영암우리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영암우리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중앙로 17-1(2F)   |   대표전화 : 061-472-1470   |   팩스 : 061-472-1469
등록번호 : 전남 다 00347   |   발행처 : 영암언론협동조합   |   발행인 : 박노신   |   편집인 : 우용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우용희
Copyright © 2018 영암우리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