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궁 정원의 피비린내가 일주일 넘게 가시지 않았다 - 조선 역사 최악의 사대주의자 김옥균과 갑신정변(2)

[2017년 9월 8일 / 제137호]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76 영암우리신문l승인2017.09.08l수정2017.09.08 13:36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1884년 베트남에서 발발한 청불전쟁으로 청의 병력 반이 조선에서 철수했다. 그렇지 않아도 약해져 가던 청의 세력이었는데 병력까지 반감한 것이었다. 이에 편승하여 일본은 김옥균을 다시 이용하기로 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김옥균과 박영효를 부추겼다. 정변을 감행하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언질을 준 것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을 또 믿었다. “간신을 제거하는 것은 우리가 할 테니 관군의 반격이 있을 경우 그것은 일본이 막아줘야 합니다.” 그들은 거사 날짜를 한성우정총국의 개국식이 있는 12월 4일로 합의했다. 당연히 개국식에는 조정의 주요 대신들은 물론 외국의 외교관들이 거의 참석하게 되어 있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신병을 이유로 불참을 통고했다.
공식 개국 행사가 끝나고 축하연이 시작될 무렵 달이 떠올랐다. 김옥균은 초초한 낯빛으로 경복궁 쪽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각본대로라면 대궐에서 불길이 올라야 했다. 그러면 놀란 대신들이 대궐로 달려갈 테고, 그때 매복시켜 놓은 자객들이 그들을 죽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길은 오르지 않았고, 얼마 후 부하가 달려와 방화에 실패했음을 알렸다.
김옥균은 즉각 우정국 옆의 민가에 불을 놓으라고 명령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북풍을 타고 불길은 삽시에 우정국 건물로 옮겨 붙었다. 불길에 놀란 민영익은 건물 밖으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자객이 그의 얼굴을 비롯한 10여 군데에 자상을 입혔다. 민영익은 기어서 우정국 건물로 들어갔다. 피투성이가 된 민영익을 보자 건물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건물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김옥균의 수구파 노상 살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서둘러 고종을 알현했다. 아직 우정국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김옥균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청군이 반란을 일으켜 창덕궁으로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어서 피신하시옵소서.”
고종은 경우궁으로 급히 옮겨갔다. “이제 할 수 없사옵니다. 일군에게 경호를 의뢰하겠습니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종이를 꺼내 ‘일사래위(日使來衛)’를 쓴 후 왕의 서명을 요구했다. 순간 고종은 부쩍 의심이 일었지만 할 수 없이 서명하고 말았다. 왕이 서명한 일사래위는 일종의 출병 의뢰서였다. 출병 의뢰서를 접수한 일본군은 경우궁에 가서 고종을 굳게 지켰다.
김옥균은 우정국에 있는 대신들에게 알렸다. 국왕은 경우궁에 있으며, 모든 신료들은 그리 들라는 어명이 내렸노라고 했다. 신료들은 하나 둘씩 드문드문 도착했다. 김옥균은 궁문 앞에서 들어가는 신료들의 신분증명서를 확인하도록 했다. 그는 수구파 대신들만을 들여보냈다. 문 안에는 신복모 등 7명의 자객이 어둠 속에서 칼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의 사관생도들로서 김옥균을 추종하던 10대 소년들이었다.
후영사 윤태준, 전영사 한규직, 좌영사 이조연 등 3인의 군부 요인이 칼에 쓰러져 헛간으로 던져졌다. 다음으로는 민비 세력인 민대호와 조영하가 희생되었다. 결국 수구파는 누구 하나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피비린내가 경우궁 정원에서 일주일 넘게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김옥균 일당은 다음 날 고종의 재가를 얻어 신내각을 발표했다. 박영효는 군사령관 겸 한성판윤에, 김옥균 자신은 재정을 장악할 수 있는 호조판서에 취임했다. 그러나 속은 것을 안 민비의 반격이 있었다. 민비는 막무가내 창덕궁으로 옮겨가서, 전 우의정 심순택을 청의 병영으로 보냈다.
심순택은 청의 원세새 등을 만나 왕과 왕비의 구출을 요청했다. 청군은 즉각 출동했고 일본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청과의 전쟁 준비를 막 시작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므로 당장은 전쟁할 의사가 없었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군사들에게 철수를 명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패주하는 일본 군사에 섞여 일본 공사관을 거쳐 인천으로 도망쳤다. 일본에 가는 군함을 타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군함을 타고 일본으로 도주했다. 이른바 갑신정변 3일천하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계속)

영암우리신문  news@wooriy.com
<저작권자 © 영암우리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영암우리신문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중앙로 42-2(2F)   |   대표전화 : 061-472-1470   |   팩스 : 061-472-1469
등록번호 : 전남 다 00347   |   발행처 : 영암언론협동조합   |   발행인 : 박 웅   |   편집인 : 우용희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 웅
Copyright © 2017 영암우리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