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작년 11월 12일 ‘민중총궐기’로 시작한 반정부시위가 최근 ‘범국민행동’으로 명칭이 바뀐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사실은 명칭이 바뀐 것이 아니라 주최가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행사의 주체 문제가 아니라 거기 사용된 ‘민중’ 또는 ‘국민’ 등의 어휘에 관한 것이다.
국민, 시민, 인민 그리고 민중, 이 네 단어는 같은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이 넷 중 어느 단어를 좋아하고 즐겨 쓰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정치, 계급적 성향이 읽히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이 네 단어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네 단어에는 모두 ‘민(民)’이 들어 있다. 따라서 이 네 단어가 모두 민을 지칭한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민은 아주 오래된 말이다. 민은 중국의 『시경』에 102회, 『서경』에 278회나 나온다고 한다. 민은 애초에는 ‘이주해 와서 노동하는 노예’의 의미였는데 춘추전국시대에 들어 ‘피통치자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전화했다. 이때 중국에서는 서민, 백성 등이 민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에서도 피통치자를 민이라고 했다. 조선의 건국이념을 만든 정도전은 『서경』의 민유방본(民惟邦本), 즉 ‘민은 오로지 나라의 근본’임을 정치적 신념으로 삼았다. 정도전은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고로 민은 국가의 근본이면서 군주의 하늘이다’라는 맹자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정도전은 민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퇴계와 율곡은 같은 성리학자이지만 사상적 결이 크게 다르다. 퇴계는 민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율곡은 민을 군주가 사랑하는 동시에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는 군주는 민을 하늘처럼 여겨야 한다는 위민(爲民) 정신을 강조함으로써 정도전의 것을 계승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국민 시민 인민 민중, 이 넷은 모두 ‘민’을 가리키지만, 각기의 말을 선택하는 주체는 표가 날 정도로 다르다. 먼저 ‘국민’은 일본에서 전용되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다용한다. ‘시민’은 주로 자유주의자들이 다용한다. 국민과 시민은 한국사회에서 거리낌 없이 사용되며 뉴스매체에서도 주로 이 두 말을 채용하고 있다.
반면에 ‘인민’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거의 금기어가 되어 있다. 조선(북한)에서 주로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15년 10월 10일 열린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행사에서 대중 연설을 했는데 25분 연설에 ‘인민’을 무려 97번이나 사용했다. 그는 “인민보다 더 귀중한 존재는 없으며 인민의 이익보다 신성한 것은 없다”면서 “(인민에게) 깊이 허리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일본인 학자 중에는 ‘인민’이 일본 산(産)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년 전 NHK 역사 프로그램에서도 이런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들은 영어 ‘The people’을 자기들이 인민이라고 번역했고 이것을 중국과 조선이 차용해서 쓰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낭설에 불과하다.
놀랍게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단어는 ‘민중’이다. 민중은 1888년 일본의 민권운동가 나카에 초민이 『국회론』에서 처음 썼다고 한다. 또한 1901년 나카에 초민의 제자 고토쿠 슈즈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발표한 ‘사회혁명당선언’에서 ‘백만 민중’이라는 말을 세 번 사용했다고 한다. (최정운, 『한국인의 탄생』)
중국에서 민중은 ‘인민 + 대중’의 합성어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요즘 들어 민중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민중은 주로 한국에서 애용되는데, 여기에는 다분히 계급적 개념(노동자, 농민)이 들어 있다. 1923년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아나키즘에 근거를 둔 ‘민중의 직접혁명’을 주창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민중이라는 말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한국 경찰에서는 ‘민중의 지팡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최남선이 쓴 ‘기미독립선언서’에도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여’라는 구절이 나온다.
‘국민’은 일본 황국신민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한편 ‘시민’은 영어 ‘citizen’의 번역어로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언어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경로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민, 시민, 인민 등은 모두 조선왕조 시대부터 쓰였던 어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국민이 163회, 시민이 395회, 인민이 2504회 나온다. ‘백성’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은데 1718회로 인민보다 적다.(민음 한국사, 19세기 편 참조)
일본의 정식 국호는 ‘일본국’이다. 또한 중화민국, 대한민국이 있고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있다. 이로써 볼 때 중국과 조선(북한)은 인민을, 대만과 한국은 ‘민’을 국호에 반영했고 일본에는 아예 ‘민’조차 들어가 있지 않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당신은 국민 시민 인민 민중, 넷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맘에 드는가? 나는 ‘인민’이 맘에 든다. 인민은 가장 전통성이 강한 어휘이고 왠지 어감도 친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1948년 대한민국의 제헌헌법에서도 처음 선택한 말은 ‘인민’이었는데 북에서 쓰는 말이라고 해서 ‘국민’으로 대체했다고 하니 참 ‘우습고도 슬픈’ 일이다.
‘동학인민항쟁!’ ‘광주인민항쟁!’ ‘인민총궐기!’ ... 그럴듯하지 않은가? 또한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치’,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 자연스럽지 않은가? 앞으로 나는 ‘인민’을 주로 사용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