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세도 가문에는 안동 김씨 다음으로 풍양 조씨 등 서너 개의 유력 성씨가 더 있었다. 그런데 제1세력이었던 안동 김씨는 순조 다음 왕인 철종(1849~1863)을 거쳐 고종(1863~1907)에 이르러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있어 소개한다. 조대비와 연계한 대원군의 아들 고종이 12세로 즉위하자 안동 김씨는 예민하고 초조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왕의 아버지가 된 대원군을 의식하고 있었다.
조대비는 풍양 조씨였다. 안동 김씨의 실세 영의정 김좌근은 재빨리 조대비의 수렴청정을 건의하여 대원군의 등장을 막으려 했다. 이에 조대비는 오히려 대원군에 대한 예우 문제를 정하라고 지시함으로써 대원군의 등장을 예고했다. 이에 김좌근, 김홍근 등이 난색을 띠면서,
“대원군을 만날 일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이것은 대원군의 정치 참여를 놓고 벌인 신경전이었다. 대원군이 집정하게 되자 종친인 전주 이씨가 부상했고 안동 김씨의 세는 약화되어 가문별 과거 합격자 수에서 6위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과 민비가 집권하게 되면서 당파는 물론 세도정치도 사실상 소멸되었고 조정은 외세 침탈로 인해 개화파와 동도서기파와 위정척사파 등으로 분화하면서 각기 부침을 거듭했다. 그리고 1907년에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후 3년 만인 1910년에 조선은 망국을 맞게 되었다.
이제 처음의 논의로 되돌아 가보자. 조선은 노론 때문에 망했다는 노론망국론 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노론이 와해된 것은 영조 말 ~ 정조 초기의 일이다. 이 시점은 아무리 늦추어 잡아도 정조가 죽은 1800년 이전의 일이다. 그런데 이덕일은 1910년 망국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노론이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왜곡하는 무리수를 범한 것이다.
사색당파 중 노론은 가장 유학적이었고 중화주의자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여기서 중화란 소중화, 즉 조선을 유일 중화국으로 보는 상당히 주체적인 세계관이다.) 하지만 이것도 노론이 실재했을 때의 일이다.
이덕일이 노론의 원조 격으로 치는 송시열은 서인이었다. 물론 노론은 서인에서 분화한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20세기에 이루어진 망국과 21세기의 친일파까지 송시열의 계보를 잇는 노론이라고 하는 것은 작위적 허구에 불과하다.
오히려 일제에 분연히 맞서 싸운 의병장은 대부분이 유학자였고 그들의 후손은 대거 동북 무장항쟁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덕일의 노론망국론 같은 것에 적합한 사자숙어로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있다.
경성제대 교수였던 다카하시 토오루는 한국 사상을 처음으로 근대적 시각에서 연구한 일본인 학자다. 그는 조선총독부 문화정책의 기틀을 다진 위인(爲人)이다. 그는 “조선의 사상은 모두 중국 사상에 종속된다”고 했고, 조선 사상의 특성으로, 옛 사상에만 머무는 고착성, 창조적 사상을 발생시키지 못하는 의존성을 들었다. 그는 조선인의 또 다른 특징으로 당파성, 형식존중, 문약성, 심미관념의 결핍, 공사의 혼동, 낙천적 성격 등을 나열했다.
이덕일은 조선이 망한 궁극적인 원인을 노론에서 발견(?)했나 보다. 그에 따르면, 18세기 후반 조선을 통치했던 정조는 조선 사회 저변에 나타났던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자 했지만, 노론은 여전히 “성리학 신정(神政) 체제”에 집착하면서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노론이 정조라는 계몽군주를 독살하고 집권하여 성리학 일변도의 반동 정치를 전개해나감으로써 조선이 멸망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이 같은 이해는 성리학이 조선의 멸망을 초래했다는 인식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정조야말로 계몽군주가 아니라 지극히 유학적인 군주였다는 것은 이제 확연한 정설이다. 독살과 같은 살인사건에는 명확한 물증을 제시해야 한다. 툭하면 궁중 암투니 독살이니 하며 주워섬기는 것은 역사를 흥밋거리로 전락시키는 부작용을 낳는다.
걸핏하면 식민사학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하는 이덕일의 말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정작 이덕일은 다카하시 토오루같은 식민철학자가 만든 사상의 틀을 답습했다. 이것은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노론이 조선을 지배했다는 것은 작위적 허구이고 성리학이 조선을 망쳤다는 것은 식민사관이다.
[사족] 중국 동북 무장항쟁지를 답사한 적이 있다. 우리를 안내한 이는 연변대학의 무장항쟁 전문가 허 아무개 수석 연구원이었다. 그는 연변박물관 무장항쟁기념관의 기획 설계를 맡은 학자이다. 그는 우리를 만나기 전 개성적인 세 팀의 안내를 맡았다고 했다.
그가 말한 세 팀은 김용옥 팀과 이덕일 팀과 조선(북한) 공직자 팀이었다. 그가 나에게 들려준 말을 직접 화법으로 옮긴다.
“김용옥 선생은 먹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이덕일 씨 팀은 왠지 돈 되는 것에 관심이 있어 보였어요.”
나는 우리 팀은 어떤지 물었다. 그는 “조선 팀보다 알찹니다”라고 답해 주었다.
- 대한민국의 꼴보수는 근현대사에 약하고 입진보는 조선사에 약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