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조선 역사에는 인기 있는 소재가 참 많다. 궁중암투, 여인권세, 당파싸움 등이 그렇고 조선 지배층의 탐욕이나 사대부들의 중화사대주의도 인기품목에 속한다. 이것들은 인기품목답게 영화나 텔레비전 사극 등에 곧잘 반영된다. 아, 그리고 현대사에서는 단연 친일파 비판이 인기품목이다. 따라서 위의 항목들에 최대한 많이 동조하는 역사 저술가가 있다면 그가 인기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독살설’이 있다. 이것은 궁중암투에 속한다. 또한 ‘노론망국론’이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조선 지배층의 탐욕, 조선 사대부의 중화사대주의와 맥이 닿아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에 열거된 여러 항목들에다 독살설과 노론망국론까지 다 포함하여 개인사관으로 피력하는 저술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이덕일이다. 실로 대단한 능력자가 아닐 수 없다.
노론망국론은 간단히 말해서 조선은 노론 때문에 망했다는 논리이다. 이덕일에 의하면 조선총독부의 관작을 받은 조선 관료 대부분(87%)이 노론 출신이며 그들이 훗날 친일파가 되었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는 것일까? 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노론의 개념부터 살펴야 한다. 우리가 알듯이 노론은 이른바 ‘사색당파’ 중의 하나이다. 조선 역사에서 최초의 당파는 선조 대(1567~1608)에 형성된 동인과 서인인데, 동인은 곧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했고 서인은 숙종 대(1674~1720)에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했다.
조선은 왕권과 신권이 경합한 나라였다. 그런데 신권(臣權)은 숙종 대부터 점차 소수 집단에 집중되는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것은 붕당(당파)제가 약화 또는 와해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소론의 지원을 받던 경종이 세상을 뜨고 노론의 지원을 받던 영조(1724~1776)가 즉위하게 되자 영조 대에는 자연히 노론이 전반적으로 정치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조는 탕평책을 구사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주요 인사를 인척으로 끌어들여 왕권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외척 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부상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사실 이때부터 붕당정치는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노론은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처벌을 놓고 이를 정당시하는 벽파(辟派, 완고하다는 뜻)와 사도세자를 동정 연민하는 시파(時派, 시류에 영합한다는 뜻)로 또 다시 분화했다. 이는 사실상 당파싸움이라고 표현되는 붕당제는 노론 하나만 유지되다가 막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조 대부터는 당파가 아닌 척신이 문제가 되었다. 정조는 척리의 폐단을 절감하여 말하기를, “척리(戚里)가 국가의 해가 되어온 것은 옛날부터 모두가 그러하였다. 내가 어린 나이로 있을 때부터 깊이 폐단을 알았다....무릇 척리에 관계되면 이 척리건 저 척리건 막론하고 꺾어 눌러야 한다는 것이 곧 나의 고심이다.”라고 할 만큼 척신에 대해 날카롭고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척신을 배제하려는 정조의 정치적 시도는 말년에 가서 실패했다. 그는 아들 순조(12세 즉위, 1800~1834)를 걱정한 나머지 순조의 장인으로 낙점한 김조순에게, 즉 장래의 척신이 될 인물에게 순조의 보호를 궁여지책으로 부탁한 것이다.
김조순은 노론-시파 출신으로 안동 김씨였다. 그는 자기 딸이 순조비가 된 것을 계기로 집권한 뒤 연이어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대를 물려가며 권력을 유지했다. 이른바 세도정치(勢道政治)는 이렇게 하여 축조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