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현대 출판 역사 가운데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를 ‘인문사회과학 시대’로 일컫는다. 유신정권 하에서는 은유·풍자적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5공화국 이후 구체적 선진 이론과 철학이 담긴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군부독재정권 당시 이러한 출판문화의 변화는 우리 사회의 모순을 깨우치고 왜곡된 근현대사를 재정립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신문과 동인지 등에 연재되던 소설들도 연이어 출판 대열에 합류했으며, 한국 출판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대하소설(大河小說)들도 출간됐다. 조선 숙종조 반봉건운동의 실천적 투쟁을 소설화한 황석영 작가의 ‘장길산’, 해방 이후 치열했던 이념 대립과 민중들의 한을 묘사한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 등으로 이 대하소설들은 민중의 정치적 각성을 촉발한 ‘역사교과서’였다.

하지만 이 서적들은 대부분 정권에 의해 ‘불온서적’으로 지정됐고, 판매금지·압수·구속 등의 탄압으로 이어졌다. 온갖 탄압에 고초를 겪던 한국 출판계의 흐름은 대학입시의 변화 등에 따라 1994년을 즈음해 또다시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된다.

‘인문사회과학 시대’의 마무리는 박경리 작가의 대표적인 대하소설 ‘토지’였다.
1969년 ‘현대문학’ 연재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지면을 옮겨가며 연재됐던 소설 ‘토지’는 1994년 9월 제16권이 발간하며 완성됐다. ‘토지’는 구한말 동학운동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하동군 평사리의 대지주 최씨 가문의 4대에 걸친 비극적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식민지시대 한국인의 개인사·가족사·생활사·풍속사·역사·사회사 등을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 삶을 재현했다.

소설 ‘토지’는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배경으로 지주·소작인·친일파·밀정·의병·승려·지식인 등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상적 경향을 가진 인물들을 탐구하며, 인간의 보편적 본질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가 하면 새로운 시대에 인류가 성취할 삶의 방식에 대한 전망도 보여주며 한국 소설사에서 역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는 2004년 SBS-TV를 통해 드라마로 선보이며 책을 읽지 않았던 많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경상남도 하동군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드라마의 흥행을 계기로 소설 ‘토지’를 활용한 관광콘텐츠를 준비했다. 화개장터, 청학동 외에는 마땅히 알려지지 않았던 하동군이었기에 이것은 큰 기회가 되었다. 하동군이 내세운 것은 ‘박경리’와 ‘토지’가 아닌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한옥 ‘최참판댁’이었다. 최참판댁은 소설 속 주요 무대로 평사리의 전통적 지주인 최씨 가문 4대가 살던 곳이다. 하지만 이 한옥 ‘최참판댁’의 건축년도는 2004년이다. 드라마 세트장으로 지은 건물인 것이다.
 

하동군에서도 최참판댁 입구에 드라마 세트장이라는 사실을 알렸지만, 적당한 세월을 보낸 한옥처럼 워낙 그럴싸하게 잘 지어진 탓에 사실여부는 사람들의 관심 밖이었다. 토지 촬영 이후에도 민속마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은 여전히 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촬영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하동군은 해마다 50만명의 유료 관광객이 찾는 ‘최참판댁’이라는 하나의 ‘랜드마크’가 생겼다. 이어 최참판댁 입구에 ‘박경리 문학관’도 지었다. 경남 통영시 출신인 박경리 작가 역시 소설 ‘토지’를 쓰기 위해 한 번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다. 인근의 많은 것들이 소설에 의해 조성되고 관광지화 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게 되자 소설을 매개체로 ‘걷기 코스’도 만들었다. 바로 ‘토지둘레길(토지길)’이다. 소설의 주무대인 최참판댁과 평사리 들판 등을 걸으며 정취를 느끼고 주변 관광자원과 연계시키겠다는 생각이었다.
토지길이 아니더라도 이곳은 전북 남원에서 출발해 경남 함양, 산청, 하동, 전남 구례를 도는 지리산둘레길이라는 명품 도보길이 지나고 있다. 토지길은 지리산둘레길 14구간인 대축-원부춘마을을 잇는 8.5㎞ 중 평사리 들판을 통해 연결된다. 

현재 ‘박경리 토지길’이라고도 불리는 ‘토지둘레길’은 최참판댁 인근과 화개장터, 쌍계사를 잇는 총 2개 구간으로 조성했다. ‘슬로시티 토지길’이라고 불리는 제1코스는 섬진강변의 평사리 공원에서 출발해 평사리 공원→평사리 들판→동정호→고소성→최참판댁→조씨고가→취간림→문암송→억양천제방→평사리공원→화개장터까지의 18㎞ 구간이며, 제2코스는 화개장터→가탄마을→십리벚꽃길(혼례길)→차시배지→쌍계석문바위→쌍계사→불일폭포→국사암에 이르는 13㎞ 구간으로 나뉜다.

소설 속 배경인 평사리 마을의 제1코스만 거닐며 관광하더라도 족히 하루를 소요할 것으로 보인다. 시작 지점인 평사리 공원은 섬진강변에 넓고 하얀 백사장과 장승 동산이 조성되어 있으며, 재첩잡이 체험도 할 수 있어 어린이들의 학습 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각종 운동시설과 대형 주차장, 캠핑장까지 갖춰 휴양 시설로서도 충분하다.

약 80만평의 넓은 면적으로 이루어진 평사리 들판은 봄에는 바람결 따라 흐드러지는 청보리밭을, 가을에는 황금들녘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들판 가운데 자리한 소나무 두 그루는 부부소나무라고도 불리며, 보는 이들의 시선을 머물게 한다. 이곳에서는 매년 10월 토지문학제와 함께 허수아비 콘테스트도 개최돼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마을과 평사리 들판 사이는 ‘동정호’라는 호수가 있는데, 불과 얼마 전까지는 늪지대였다. 섬진강 물길에 의해 만들어진 동정호는 그동안 수심이 매우 얕고 수시로 물이 말라 오랫동안 방치되어 자연 습지였다. 하동군은 이곳을 인공호수로 재개발해 지난해 7월 생태산책로, 쉼터, 청소년 생태교육장, 두꺼비 탐방로 등 생태복합문화공간 ‘동정호’로 재탄생시켰다. 또 곳곳에 포토존을 조성하고 출렁다리 등 아기자기한 모습을 갖추며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아 이제는 ‘토지길’의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어 최참판댁으로 오르는 길목에는 음식점, 카페, 노점 등이 관광객들의 허기진 배와 입맛을 돋우고, 개량한복 등을 판매하는 기념품 매장 등 자연스레 관광객의 소비도 유도하고 있다. 민속마을을 방불케하는 드라마 세팅장에는 토끼, 닭 등 동물들을 키우고 있어 어린이들의 환호소리도 곳곳에서 들리기도 한다. 이밖에도 마을과 섬진강 등 자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스카이워크와 고소성, 한산사 등 다양한 즐길거리와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코로나19가 지속되고 있지만 이곳의 자연친화적인 공간은 가족과 함께 안전하게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위드 코로나 시대의 가족단위 관광명소로 인기는 꾸준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동군 관계자는 “동정호 생태습지를 중심으로 박경리 토지문학관과 최참판댁의 인문학, 평사리 캠핑장과 섬진강 레저수변문화, 지리산생태과학관의 교육문화, 지리산의 산림레저문화, 평사리들판의 생태문화가 어우러져 10차 산업의 미래 먹거리 공간이자 생태계가 살아 숨 쉬는 생태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