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동안 천연염색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이 일이 싫었던 적은 없었어요.”
천연염색 일을 천직을 넘어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예술가가 영암에 살고 있다. 도포면의 ‘천연염색 마노 환희지 공방’의 김경희 대표(54세)가 그 주인공이다. 

강진군 출신인 김경희 대표는 이십대 후반 무렵 우연히 천연염색을 배우게 됐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너무 재미있고 신기해서 차츰 그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천연염색과의 인연이 올해로 26년째다. 

김 대표가 천연염색을 시작했던 1995년 무렵만 해도 이 일이 대중화되지 않아서 염색한다고 하면 멀쩡한 옷에 이상한 짓거리를 한다는 등 안 좋은 소리를 들을 때였다. 그래도 천연염색의 매력에 빠져 미친 듯이 일을 배웠다.   

그렇게 천연염색을 사랑한 김 대표는 ‘천연염색 환희지 공방’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본격적인 염색쟁이의 길로 들어섰다. ‘환희지(驩喜地)’는 잘 아는 스님이 지어준 법명으로, 땅(자연)에서 얻어지는 기쁨을 누리라는 뜻이다. 김 대표는 그 법명처럼 지금까지 자연으로부터 많은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왔노라고 자부했다.

그렇다면 영암과의 인연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그 당시 영암에는 천연염색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영암의 생활개선회 회원 및 여러 사람들은 강진의 김 대표 공방까지 와서 배웠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인연 덕분에 15년 전 6년간의 서울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전라도로 내려왔을 때 과감히 영암에 터를 잡을 수 있게 됐다. 

천연염색은 자연에서 채취한 나무껍질, 풀, 꽃, 열매 등의 자연 염료로 물을 들이는 것이다. 자연에서 나온 모든 식물이나 광물 등은 천연 염색재료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천연염색은 합성염료에서 보기 어려운 자연스럽고 특유의 아름다운 색상을 갖고 있다. 특히 피부 알러지를 일으키지 않고 환경친화적이어서 최근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각광 받고 있다. 

그중 마노 환희지 공방은 전통발효 방식의 쪽 염색을 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쪽을 전통방식으로 발효시킨 후 얻은 염료를 사용해서 염색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무척 까다롭고 고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얻은 염료는 색이 더 깊다.
그 외에 치자, 오리목, 소목, 메리골드, 감물, 황토 등으로부터 다양한 천연염료를 얻어서 염색을 하고 있다. 

현재 천연염색은 예전보다 많이 대중화가 되어 다양한 제품들이 나와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천연염색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찾아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이에 옷, 가방, 스카프, 이불, 커튼 등 기존 천연염색으로 만들 수 있는 제품 외에 다양한 방식으로 천연염색의 활용도를 다각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패브릭원단에 황토로 염색한 벽지를 시공해 특허를 내기까지 했다. 또 패브릭아트 자격증을 취득해 염색원단에 그림을 그리는 패브릭아트 작업도 하고 있다. 패브릭아트는 염색원단에만 사용할 수 있는 특수 패브릭물감을 이용하면 어떤 디자인에도 작업할 수 있다. 

이렇듯 지금까지 쉼 없이 일만 해 온 김 대표는 어깨, 목, 손가락 등 온 몸이 성한 곳이 없다. 김 대표는 “주변에서는 이제 일 좀 줄이라고 성화다. 하지만 일을 하다보면 몸이 아픈 것은 늘 뒷전이었다”면서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염색일을 계속 하기 위해서 내 몸을 돌봐야 할 시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늘 베풀면서 살아야

김 대표는 작년 7월 6일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비까지 쏟아지는 그날은 공방이 이사 하는 날이었다. 
그날을 회상한 김 대표는 “오랫동안 작업했던 공방이 폐교라서 낡고 위험했다. 그래서 결국 이사하기로 결정했는데, 하필이면 이사 당일 비까지 쏟아졌다.
혼자 이사하려니 막막하기만 했었는데, 아침에 공방 마당에 나가보니 트럭 38대가 와있지 뭔가. 생활개선회, 지역주민, 지인분들이 이사를 도와주기 위해서 트럭을 몰고 온 거였다. 모두의 도움 덕분에 며칠 걸릴 이사가 단 하루 만에 끝났다”면서 “그때 ‘내가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받고 있구나’라고 깨달았다.
늘 베풀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김 대표의 인연은 오래되고 깊다. 타지 사람이 영암에서 자리를 잡기가 힘들 법도 한데, 김 대표는 지역민들과 잘 어울려서 지내고 있다. 특히 종교를 초월해서 이웃하고 있는 교회와도 허물없이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앞집에 사는 이웃도 공방을 오고 가는 차량 때문에 불편할 법도 한데, 싫은 내색 없이 더 적극적으로 공방을 홍보하고 다닌다.  

김 대표는 말한다. “특별히 내가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많다. 특히 전국 각지에서 만난 오래된 인연들이 지금도 나를 잊지 않고 꾸준히 찾아와주고 있다”면서 “모든 인연들이 고맙고 소중하기만 하다.”
사람냄새와 천연염료 냄새가 가득한 마노 환희지 공방. 그곳은 사람의 인연도 깊고 색도 깊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그곳에는 도대체 어떤 마력이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