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갑수

설이 지났다. 음력으로 쇠는 설은 나이 한 살을 보태게 되었다는 실감을 들게 만든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의 설이었다. ‘내가 벌써 아홉 살이라니…’ 그때 9세의 어린이였던 나는 내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9세 나이의 무게감은 실로 작지 않았다. 그런데 이로부터 무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나이의 무게감이 아홉 살이 되던 때의 그것보다 심각하지(?) 않은 이유는 대관절 무엇이란 말인가?

목소리가 큰 대중이 싫어하는 친일 천재 시인 서정주가 있다. 그는 <꽃밭의 독백>이란 시에서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고 하면서, ‘활로 잡은 산돼지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벌써 입맛을 잃었다’고 했다. 

여기서 산돼지와 산새는 (아마도)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온갖 유미적 체험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런 것들에 이제는 입맛을 잃었다고 했다. 지금의 나에게 상당히 공감되는 대목이다.

사람이 세상의 좋은 것들에 입맛을 잃기 위해서는 일단 좋은 것들을 두루 체험해 봐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그렇다. 설에 나이 한 살을 보태며 생각해 보니, 나는 단연 세상의 좋은 것들을 충분하리만치 체험하는 삶을 산 것 같다. 그러니 이제는 산돼지에게도 산새에게도 입맛을 잃었다고 하는 시인의 선포에 공감한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란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는 으레 돈, 권력, 명예 등이 답으로 제시된다. 물론 돈, 권력, 명예 등은 유력한 것이고, 이런 것을 가지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다 가진 사람보다 더 멋있는 삶은, 이런 것을 가질 수는 있지만 아예 안 가지려고 하거나 우연히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런 것들을 하찮이 버릴 수 있는 삶이다.

회고해 보니 나는 대체로 이런 삶을 지향해 왔다는 말을 감히 할 수가 있다. 돈과 권력과 명예는 사실은 나쁜 것이니 가지는 족족 소모해 버려야 했다. 돈, 권력, 명예 따위를 가지고 지키려는 삶을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자식들을 키우던 청, 중년 시절은 몰라도 최소한 장년 이후의 나는 기꺼이 이런 삶을 위해 노력해 왔다. 

친일 천재 시인 서정주는, 산돼지와 산새들에게 입맛을 잃었다고 하기 전에,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고 했다. 

여기에서 ‘노래’는 아마 시를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천재시인에게도 시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나 보다. 그러니 하늘에 가지 못한 채 구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거나 피안에 이르지 못하고 바닷가에 가 멎어버리고 만 것이다. 없다. 세상에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진실로 좋은 것’이 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여!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질 실력이 없으니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을 추종하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는 사람들이여! 내가 나이 한 살 더 보태면서 후생들에게 간절히 이르고 싶은 말이 있다. 

돈과 권력과 명예는 헛된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행복과 전혀 관련이 없다. 돈과 권력과 명예는 친근한 말로 해서 X도 아니다. 일찍이 보들레르는 “세상에서 유력한 놈들은 모두 야비하다”고 했다. 사실 이 말은 “세상에서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지고 있는 놈들은 모두 개자식들이다”라는 말과 99.9999% 같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