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갑수

율곡이 경세가로서 본격적인 면모를 보인 것은 39세 때인 1574년(선조 7) <만언봉사>(萬言封事)를 통해서였다. 이는 만언에 이르는 상소라는 뜻인데, 실제는 1만 2,000자가 넘는다. 또한 ‘봉사’란 신하가 임금에게 상주할 때 내용이 누설되지 않도록 검은 천으로 봉해 올린 데서 생긴 말이다.

다음은 <만언봉사>의 서두 문장이다.

“정사(政事)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에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사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에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과 현신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치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치세를 이루려면 성군과 현신이 있으면 된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율곡 역시 정치 초기에는 전통적인 왕도정치를 내세우면서 모든 치세와 난세는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이 <만언봉사>에서는 달라진다. 아무리 성군과 현신이 만난다고 해도 시의와 실공이 없으면 치적을 이루지 못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정치세력이 사림으로 교체되었는데도 여전히 난세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을 율곡이 달리 파악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율곡은 경세의 방법론을 ‘사람의 문제’에서 ‘방법과 태도’의 문제로 전환하여 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방법과 태도’를 한 단어로 바꾸면 ‘능력’ 또는 ‘역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정치가에게는 도덕보다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관점으로서, 당대로서는 대단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율곡은 당시로서는 이해되지 못한 선구적 경세가였다.  

율곡은, “시의라고 하는 것은 때에 맞춰 변통하여 법을 마련해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고, 실공이란 진정성 있는 과감한 실천을 말하는데 이는 제도적 접근 방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율곡은 정치의 최종 목표를 민생에 두었고 이를 위해서는 위해 체계적 제도 개혁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율곡은, “학문을 강론할 때에는 반드시 의리(義理)를 추구해야 하고 정사를 논할 때에는 반드시 실효를 추구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실효란 무엇보다 민생의 개선을 의미한다고 했다. 

“율곡의 이러한 인식은 사림이 조정에서 권력을 획득한 이후, 예상과 다르게 전개되는 현실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던 끝에 도달한 경세의 새로운 좌표였다. 율곡 개인으로서도 <만언봉사>는 자신의 경세론 선언이었다.”(이정철,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이런 점에서 율곡은 당대의 이황이나 기대승보다 단연 선진적인 경세가였지만 그의 경세론은 이미 보수화되어 가고 있던 조정의 사림들 사이에서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당시의 권력 판도는 전반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율곡이 속한) 서인보다 동인이 강세였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당시의 동인은 서인을 사당(私黨)으로 규정하고 서인의 최초 인물 심의겸을 소인으로 지목했다. 율곡은 대사간에 임명되었지만 이를 사양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동인이 군자의 이름을 얻고 서인이 소인의 이름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이 곤궁한 백성에게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는 정치세력과 관련된 국시(國是)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 이제는 민생과 관련된 국사(國事)를 해결해야 한다는 뜻을 담은 말이었다.

당시의 관료와 지식인들은 도(道)와 의(義)를 추상적으로만 수용하는 폐단이 있었다. 다시 말해 도와 의를 민생의 본질인 안민과 연결하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도학을 올바른 제도로 연결시키고, 올바른 제도의 목적을 안민으로 설정한 것은 율곡 경세론의 핵심이었다. 

율곡은 안민의 현실적 내용이 부역, 즉 세금 문제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천하국가의 안녕은 부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율곡은 진보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것이고 이에 따라 치세와 난세가 갈라진다고 하면서, 진보면 진보 퇴보면 퇴보이지 정체는 없으며, 치세가 아니면 난세가 되는 것이지 평균은 없다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율곡은 관성적인 현실 인식을 버리고 현실 그 자체의 역동적 가변성과 위험성에 착목했다. 당시 다수의 관료와 지식인들은 율곡을 경원시했는데, 약간의 시차를 두고 이원익이나 조익 그리고 김육같이 비교적 당파성이 엷은 관료들이 율곡의 경세론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이것이 훗날 우리 역사 최고의 개혁책인 대동법으로 결실하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