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영암에살다
지난해 영암군이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됐다. ‘여성의 성장과 안전, 행복이 보장되는 곳’이라는 뜻의 여성친화도시. 영암 속에서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펐던 그녀들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본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똑 부러지는 인상, 신북면 출신 박정윤 씨는 어느덧 5년차 베테랑 귀농인이다. 

올해 33세의 박정윤 씨는 영암여고를 졸업하고 광주의 한 대학교에서 농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귀리농사에 뜻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에서의 삶이 행복하지만 너무 빨리 놓아버린 공부가 많이 아쉽다고 한다.

“원래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었어요. 산업디자인과는 2학년까지 공통 과목을 배운 다음 3학년 때부터 전공을 선택하거든요. 그때 시각디자인과 도자기로 나뉘는데 도자기를 선택한 거죠. 정말 단순하게 흙이 좋아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좋아서 선택했는데 ‘아 도자기로는 밥 먹고 살기 힘들겠구나’ 느끼고는 다 내려놨죠.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에요. 나중에 여유만 된다면 마당 한쪽에 작업실을 만들고 차분히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에요”

도자기 물레에서 손을 뗀 박정윤 씨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대부분이 단기간 계약직일 만큼 88세대의 아픔도 뼈저리게 느꼈다. 다행히도 맡은 일이라면 끝을 보는 박정윤 씨의 능력을 인정해준 한 회사에서는 꽤나 긴 시간을 근무했다.  

“비료회사를 다녔어요. 급여도 근무환경도 꽤나 괜찮았죠. 능력도 인정받아 3년 정도를 다녔어요. 헌데 뭔 바람이 불었는지 푸드트럭에 관심이 생긴거에요. 워낙에 개척하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데다 그때는 피가 끓는 어린나이니까 가능한 선택이었죠. 결국에는 건강문제와 전국을 뒤 흔들어 논 사스까지 겹치면서 길게 하진 못했지만 참 좋았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박정윤 씨는 본인에게 ‘역마살’이 끼었단다. 새로운 곳, 아름다운 곳, 신기한 곳. 그저 가보지 못한 곳이라면, 또 기억에 남는 곳이라면 주저 없이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 말고 혼자서 휙 떠날 수 있는 여행. 작은 경차하나 끌고서는 전국을 다 돌았어요. 제주도도 한 10번 정도 다녀오고 강원도 오지 곳곳마다 가보고. 혼자서 독도까지 다녀왔으니 이정도면 ‘여행 매니아’죠. 지금은 아이들 키우느라 시간 내기가 힘들지만 언젠가는 다시 한 번 전국일주를 하고 싶어요”

박정윤 씨는 결혼을 앞두고 귀농을 결심했다. 남편과 떨어져 지내야 할 시간이 길어질 테지만 태어날 아이와 부모님을 생각해 어렵사리 내린 결정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상의를 많이 했어요. 남편 직업 상 여러지역을 옮겨 다녀야 하는데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과감하게 결정한 것이죠. 어차피 부모님이 평생 일구신 논밭을 그대로 남에게 넘기기보다는 나라도 농사를 지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던 차에 잘 맞아진 부분도 있었죠. 결정을 내리고 본가에 돌아와 집안 경제사정을 들여다보니 정말 망치로 맞은 것 같았어요. ‘안 쓰고 안 먹는’ 내 부모님들이 평생 일한 대가가 겨우 이정도 밖에 안 되나. 그때부터 부모님에게 경제권을 넘겨받았어요. 절 항상 믿어주시는 부모님이기에 흔쾌히 허락하셨어요”

생각지도 못한 집안 상황에 충격을 받은 박정윤 씨는 이 상황을 타게하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전에 일했던 비료회사의 영암 판매권을 가져왔어요. 재직시절에 회계를 해서 어떤 재료와 공정으로 만드는지, 얼마나 잘 관리 되고 있는지, 얼마나 품질이 뛰어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요. 다행히 당시영암 판매권자가 공석으로 남아 있었어요. 며칠을 쥐어짜서 발표자료 만들어 사장님을 찾아갔죠. 딱 한마디 하셨어요. ‘응. 너라면 잘할 거야’. 참 감사한 분이죠”

4살, 2살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박정윤 씨는 여느 부모들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농촌에서 생활하는 부모라면 누구나 어려움을 털어놓는 교육과 의료다.

사랑하는 고향이라서, 내 아이들이 자라야 할 터전이라서 그 아쉬움이 더 크다고 한다.

“가장 큰 어려움은 당연히 교육 인프라와 의료시스템이죠. 비단 귀농인이 아니라도 농촌에 생활하는 아이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겠죠. 어느 농촌이든 아이들을 위한 지원이 너무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어요. 노인복지의 절반이라도 아이들을 위해 쓰인다면 이렇게 열악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죠. 정치인 중 누구라도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준다면 당당하게 말하고 싶어요. 투표권을 가진 성인들만 바라보지 말고 우리 사회를 이끌 아이들을 바라봐 달라고 말이죠”

박정윤 씨는 젊은 여성에게 결코 쉽지 않은 농사일을 하면서도 주경야독으로 한국방송통신대에서 농학과 공부까지 마친 ‘똑순이’다.

“농사는 ‘확률 높은 도박’이라고 생각해요. 날씨의 영향도 많이 받는데다 해마다 가격이 널뛰기를 하죠. 올해 농사는 성공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농사꾼은 없죠. 다만, 내가 더 공부하고 노력한다면 그 성공 확률은 높아지는 것이 당연하죠. 어차피 도박이라면 그 확률을 높이기 위한 방법은 총동원 해 봐야죠. 이제 귀리농사에 대한 기술은 많이 자리를 잡았어요. 판매루트를 다양화하는 것만 남은 셈이죠. 최종 목표는 중간상인 없이 농사꾼의 땀이 제 가격을 받는 것, 높은 품질의 수확물을 정당한 가격에 소비자에게 소개하는 것이에요” 

고향 영암에서 귀리농사와 자식 농사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영암 귀리부인’ 박정윤 씨. 그녀의 꿈은 오늘도 똑 소리 나게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