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갑수

현대에 들어 최선의 사회적 공공선이 ‘민주주의’라면 조선시대에는 이에 필적할 만한 것으로 ‘지치(至治)’가 있었다. 지치란 성리학의 이상이 구현되는 정치를 뜻한다. 이는 개혁을 추진하다가 38세에 좌절한 조광조가 쓴 말인데 이를 이어받은 사람이 이황이다. 

이황은 조광조가 역설한 이상 정치에 깊이 공감하면서광조가 실패한 이유를 분석했다. 그러고는 조광조가 못 이룬 지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리학적 이상에 헌신할 수 있는 사대부가 정치적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과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 실행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이황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사대부들이 ‘획득한 권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의 문제까지는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율곡은 바로 이 문제에 답을 낸 사대부였다. 율곡은 민생 실현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제도적 측면에서의 경세론이 탄생한다. 율곡이 조선시대 경세론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훗날의 대동법은 율곡의 경세론이 만들어낸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러나 율곡(1536~1584)의 시대는 조선 사회의 여러 모순이 불거지고 대내외적으로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이런 이유인지 율곡이 생전 구체적으로 실행시킨 제도적 실적은 별로 없다. 

율곡은 중종 31년(1536) 외가인 강릉 오죽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원수, 어머니는 신사임당이다. 아직도 결혼을 할 때, ‘장가간다’, ‘시집간다’는 말을 하는데, ‘장가간다’는 16세기까지 남자가 처가에 가서 사는 풍습을 말하는 것이고 ‘시집간다’는 17세기 이후 여자가 시가에 가서 사는 풍습을 말하는 것이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자기 집이 있는 파주에서 신사임당의 집이 있는 강릉으로 장가 갔다.  우리가 알듯이 신사임당은 5만원권, 율곡은 5천원권 지폐의 인물로서, 모자가 함께 지폐 인물이 된 예는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없을 것이다. 

신사임당은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인 가정의 둘째딸이었다. 신사임당은 19세에 결혼하여 4남 3녀를 낳았는데 율곡은 아들로는 셋째, 형제 전체로는 다섯째이다. 율곡은 선조 즉위년인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몇 개 고을의 수령을 지내기도 했다. 

신사임당은 38세에 시집살림을 맡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때 율곡은 6세의 어린이였다. 그들은 오늘날의 수송동, 청진동, 삼청동 등지에서 살았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의 최종 직책은 종5품 수운판관이었는데 그가 매우 변변치 못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속설이다. 

이것은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경우에는 더 심하다. 김성립은 과거 문과 급제자이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전사한 인물이다. 비범한 여자를 맞이한 덕분(?)에 손해를 보는 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같은가 보다.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하던 율곡의 인생 시련은 16세에 찾아들었는데 그것은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이었다. 율곡은 엄청난 충격과 슬픔을 겪었다. 율곡이 3년 동안 시묘를 한 후 금강산에 입산하여 승려가 된 것은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다소 파행적인 재혼과 관련이 있다. 율곡은 아버지 이원수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거의 없다. 

1년 뒤 하산한 율곡은 강릉 외가에 가서 살면서 불과 1년을 공부하고서 21세에 소과 초시를 장원으로 통과했다. 율곡 자신도 비범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주변에도 뛰어난 인물이 많았는데 그 중에 성혼(1535~1598)과 송강 정철(1536~1593)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은 끝까지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다. 율곡과 송강은 둘 다 이른 나이에 과거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율곡이 먼저 죽자 송강이 제문을 지었다.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무슨 일컬을 만한 것이 있기에 공은 30년 동안이나 유독 나에게 관대했던 것일까? 나의 성급함과 편협함은 공의 고민을 일으켰고, 절교할 만한 사유도 많았지만 공은 끝내 옛정을 버리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다시 의견이 일치되어 같이 어울렸으니, 공은 실로 어질었다”(이정철 저,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