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영암에살다
지난해 영암군이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됐다. ‘여성의 성장과 안전, 행복이 보장되는 곳’이라는 뜻의 여성친화도시. 영암 속에서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펐던 그녀들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본다.

“우리 아내요? 현모양처이자 작은 거인이죠”

지난 2005년 학산면 광암마을에 터를 잡은 안봉희 씨와 남편을 만났다. 아담한 체구에 말투에서는 구수한 부산사투리가 묻어나는 안봉희 씨는 약 30여 년간 부산에서 살다 영암이 고향인 남편을 따라 이곳에 정착했다. 소위 말하는 ‘황혼기 계획 귀농’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부산에서 알아주던 건설 기술자인 남편이 젊었을 때는 돈도 많이 벌어다 줬죠. 집에 들어오면서 검은 봉다리 하나를 주는데 열어보면 현금다발이 있고 그랬어요. 사우디도 몇 년 다녀오고 했던지라 돈 걱정은 크게 없었죠”

여느 평범한 주부처럼 집안일에 전념했던 안씨는 IMF를 맞으며 큰 시련을 겪었다.

“IMF터지면서 남편이 일하던 회사들이 다 문 닫았어요. 그래도 벌어놓은 돈이 있으니 그렇게 마음이 급할건 없었는데 워낙 진취적인 남편은 그게 아니었나봐요. 둘째딸과 금융투자를 배우며 주식 장을 오가더니 어느새 모아놓은 돈을 다 날려버린거죠”

주식투자 실패로 크게 상심한 남편은 집을 떠났다. 남편이 향한 곳은 어린 시절을 보낸 학산 광암마을이었다. 당분간 친구 집에 머문다며 연락이 왔다.

“남들은 아이가 생기면 아이를 위해 산다는데 난 그게 안되더라고요. 지금도 남편이 밖에 나가면 수시로 전화해서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는데 그때는 얼마나 마음이 쓰였겠어요. 집을 나간지 3달 정도 있다가 안되겠다 싶어 영암으로 갔죠. 아이들은 다 컸으니 부산에 남겨두고”

영암에 와 남편이 살던 곳을 직접 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다 허물어져가는 집에 세간은 아무것도 없지. 눈물이 핑 돌죠. 그래도 남편이 기술이 있어서 지금은 남부럽지 않게 꾸며 놨지만 그때는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죠”

‘다시 일어나자’ 마음을 다 잡은 부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안씨는 호박, 옥수수, 배추 등 농사를 짓고 남편은 기술을 살려 건설현장을 다녔다. 미꾸라지 양식장도 운영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남편이 남들 하는 것으로는 돈 못 번다며 미꾸라지 양식 기술을 배워왔어요. 이 지역에는 없다보니 잘 될 거라면서. 생물 키우는 것이 말처럼 쉽겠어요? 그러면 누구나 다 돈 벌지. 결국 돈만 날렸죠 뭐. 그래도 좋았어요. 남편이랑 함께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남편분이 왜 그렇게 좋냐’는 물음에 안봉희 씨는 수줍은 웃음을 보이며 연애 시절을 얘기했다.

“회사와 집만 오가던 처녀시절에 절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뭐라도 해보라며 펜팔을 권유했어요. 당시에는 잡지에 펜팔을 원하는 주소들이 올라오곤 했죠. 그렇게 남편과 펜팔을 시작했는데 글씨를 너무 멋있게 쓰는 거에요. 그러다 첫 만남에서 훤칠한 외모에 ‘뿅’간 거죠”

그리고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남편덕분에 이렇게 살아있다’며 이야기를 꺼내 놨다. 

“사실 남편이 절 살렸어요. 그 당시에 내가 자주 기침을 했는데 가족들 모두 가벼운 감기겠거니 하고 신경을 안 썼죠. 그런데 남편이 병원을 가자는 거에요. 별거 아닌데 하면서도 따라갔죠. 진찰결과 초기 결핵 판정을 받았어요. 그 시절에는 결핵이 지금의 암처럼 무서운 병이었죠. 1년 넘게 투병을 했는데 옆에서 남편이 큰 힘이 돼 줬죠”

안봉희 씨는 논과 축사에서 지내며 느끼는 기분과 상황 등을 ‘카카오스토리’에 일기형식으로 풀어쓰고 가끔 낭만적인 시를 지어 올리기도 한다. 벌써 1856개의 이야기가 쌓였다. 

“반응 좋아요 아주. 처음에는 농사를 지으며 이때는 뭘 했는지 기록하는 의미였는데 지금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공간이 됐어요. 농촌에서 생활하며 느끼는 그날그날의 이야기를 그저 내 마음이 가는대로 적을 뿐인데 칭찬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시집을 한 번 내보라고 권유하기도 해요. 그래서 목표가 생겼어요. 나중에 나이가 들어 농사일이 버거워 지면 이제는 집에 앉아 사람 냄새나는 글을 써보고 싶어요. 그때 되면 시집도 한 번 내봐야죠”

이제는 귀농인이 아닌 영암인이 된 안봉희 씨, 그녀의 행복함을 품은 글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