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영암에살다
지난해 영암군이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됐다. ‘여성의 성장과 안전, 행복이 보장되는 곳’이라는 뜻의 여성친화도시. 영암 속에서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슬펐던 그녀들의 인생이야기를 들어본다.

“나 같은 할머니한테 무슨 들을 얘기가 있다고 찾아왔어”

작은 SUV를 몰고 나타난 80세 방명월 단장의 얼굴에는 홍기가 가득했다.

장흥에서 태어나 27세에 영암으로 시집 와 53년간 영암에서 살고 있는 방명월 단장은 남들에게 자랑스레 꺼내 보일 이야기가 없다고 한사코 손사래를 휘저었다.

“나이가 드니 다 잊어버렸어. 좋았던, 좋지 않았던 지나간 일 일 뿐이지. 그거 안고 살아봐야 뭐가 좋겠어”

어렵게 말문을 연 방명월 단장은 지독히도 괴로웠던 시집살이 이야기를 꺼내놨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시집살이 이야기에 방명월 단장의 눈시울이 발갛게 물들었다.

“말도 못해 아주. 시누 둘 다 한동네에 살았는데 시누 등쌀에, 시부모 등쌀에 아주 징그러웠지. 게다가 남편은 밖으로만 돌지. 매일 눈물 바람이었지 뭐”

남편은 된장 항아리 한번 들어주지 않을 만큼 무심하기만 했다. 농사와 슈퍼마켓을 병행하며 한 푼 두 푼 모아놓은 돈도 모두 남편의 손에서 증발했다. 

날마다 문을 두드리는 빚쟁이와 독촉장. 방명월 단장은 애들 데리고 도망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맞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고무신도 갖다 놓을 정도로 없는 것 없는 슈퍼마켓을 했지. 농사도 같이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돈을 벌었어. 이제 허리 좀 펴나보다 하는데 어느 날부턴가 남편이 밖으로만 돌더라고. 워낙에 돈 씀씀이도 컸지만 보증도 여러 군데 서 줬나봐. 빚 갚느라 이거 저거 다 팔고도 부족해. 도망칠까 생각도 많이 했는데 성격 상 그게 안 되더라고. 평소에 음식 잘한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던 터라 염소탕 가게 한 번 해보자 하고 일어났지. 한 10년 운영했는데 아주 잘됐지. 차가 수십 대 줄서서 한 대 빠지면 두 대 차고 그랬어. 염소 7마리 분량이 하루에 다 팔리기도 했으니까. 그 돈도 결국 빚잔치에 다 까먹었지만. 사별한 지 10년 정도 됐는데 그 후로도 빚 갚느라 애 많이 먹었지. 엊그제는 15년 전에 20만원 빌려줬다는 사람 만나서 그 돈도 갚고 왔어”

천성이 부지런한 방 단장은 어려운 상황에도 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지역 일에 앞장섰다. 그래서인지 본인이 어려움 속에서 일어서려 할 때마다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고생 많이 했지. 일어설만하면 여기서 터지고 저기서 터지고. 그래도 내가 참 인복이 많은가봐. 주위 사람들이 도움을 많이 줬어. 맛있어서 오는지 맛없어도 오는지 항상 식당이 붐볐으니까. 한 번은 손님상 차려놓고 스르르 잠들었는데 눈 떠 보니 손에 돈이 쥐어 있는거야. 나 깰까봐 조심스레 쥐어놓고 가신거지. 참 고마운 분들이다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 때 받은 거 갚느라고”

노인일자리 창출사업의 일환으로 모싯잎 송편을 만드는 남송리부인회 영농조합법인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방명월 단장의 연 수익은 약 500만원이다. 이마저도 대부분은 운영비로 다시 돌아간다.

“한 열 댓 분이 같이 하시고 있어. 다 노인들이지. 연 수익금이라 봐야 한 1000만원 왔다 갔다 할 거야. 그 돈으로 떡 만들 쌀이랑 콩 사고, 운영비 쓰고 일한 사람들 인건비 주고 나면 한 500만원이나 남아. 그것도 다시 운영하는데 쓰지. 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기계를 안 쓰고 다 손으로 만들다 보니 손님들 입에 맞았는지 손님이 많이 늘었어. 영광에서 모싯잎떡 공장하는 사람이 우리 송편 먹어보고 싸갈 정도니 맛은 있나봐”

수익창출이 목표가 아닌 봉사활동으로 생각한다는 방명월 단장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놓고 싶지 않다고 한다.  

“누가 지나가면서 ‘아이고 마을 어르신들 용돈벌이 해주시려다 단장님 몸부터 상해요’ 그래. 그래도 어쩌겠어. 나라도 이 일을 붙잡고 있어야 동네 노인네들 몇 만원이라도 벌지. 이 나이 돼봐. 오히려 안 움직이고 집에 있으면 몸이 더 아파.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일을 해야지”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일을 손에서 떼지 않겠다는 방명월 단장.

오랜 시간 후에도 그녀의 손맛이 담긴 송편이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